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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지진의 여파는? 삼성의 앞길을 가로막은 반도체 방패, TSMC의 성공비결②

소비더머니 · 2024-03-17 · 유튜브 시청 348,197 · Board Views 6 ·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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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드컴#엔비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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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미상 ·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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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창이 1985년 대만 정부의 요청으로 연구기관장직을 맡아 반도체 산업을 일으켰고, 생산 전문 파운드리 모델의 TSMC를 설립했다. 설계와 경쟁하지 않는 파운드리 전략으로 엔비디아·애플 등 신생·대형 고객을 확보해 성장했다. 다만 미중 갈등과 대만 지정학 리스크가 TSMC의 과제로 남아 있다.

다듬은 글

※ AI가 다듬은 글(오탈자·군말 정리)

01. 아, 나는 미국 주요 기업에서 CEO는 못 되겠구나 하고 느낀 무렵, 모리스 창에게 1985년경 뜻밖의 연락이 옵니다. 미국이 아니라 대만이었어요. 대만의 국책 연구소를 미국의 벨연구소처럼 키워 달라는 내용이었죠. 사실 처음에는 국적도 미국이었으니 대만을 위해 뭘 해 보겠다는 거창한 생각을 가지고 간 게 아니었다고 해요. 주변에서도 말렸고, 심지어 당시 별거 중이던 아내는 미쳤냐고 했다고 합니다. 그럼 왜 간 걸까요? 옛 추억 때문도 아니죠. 대만에 간 것도 성인이 되고 나서 회사가 대만에 반도체 조립 공장을 세우려고 그를 출장 보냈던 60년대 후반이 처음이었으니까요.

02. 모리스 창의 어릴 적 꿈은 중산층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꿈은 이미 실현됐어요. 미국 회사에서 임원을 오래 하면서 죽을 때까지 쓸 돈은 다 번 것 같았고, 나이는 어느새 50대 중반이었죠. 미국에서는 CEO처럼 조직의 넘버원이 되기는 어려워 보였지만, 대만에서는 연구 기관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아시아 출장을 다니면서 보고 느낀 것도 있었다고 해요. 무엇보다 그에게 부탁을 한 인물은 60년대 후반 대만 출장 때부터 인연이 있던 사람이었고, 대만에서는 위인 반열에 드는 인물이었습니다. 대만 경제 정책을 이끌며 나라를 발전시켜 '경제 기적의 아버지', '대만 과학기술의 대부'로 불리던 인물이었죠. 그래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03. 그런데 그 역시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다고 합니다.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도 대만에 이렇게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몇 년 안에 미국으로 돌아갈 거라 생각했고 대만에 회사를 세울 계획도 전혀 없었다고 말했죠. 그렇게 연구 기관장으로 부임했는데, 불과 3주쯤 지나 같은 인물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04. 만나 보니 그가 말했어요. "우리가 반도체 산업을 일으키고 싶은데 아이디어를 주십시오." 아이디어 정도로 끝나려나 싶었는데, 이어진 말이 달랐습니다. "그리고 그걸 당신이 직접 맡아 주세요. 필요한 예산은 얼마든지 총통에게 직접 말씀해 주세요." 그러면서 17쪽짜리 계획서를 내밀었다고 합니다. 모리스 창은 훗날 당시를 영화 <대부>에 나오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에 비유했습니다. 거절하면 끝이라는 뜻이죠. 적어도 대만에서는 야망 없는 사람으로 찍혀 더는 기회가 없을 터였습니다.

05. 게다가 대만에 온 이상 이 제안을 들어주지 않으면 잘릴 게 뻔했습니다. 그러면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것 봐라, 막장으로 흘러가니 꼴 좋다"라고 할 테고요. 집에 안 갈 거면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06. 그때까지 대만의 반도체 산업은 어땠을까요? 60년대 후반 미국 반도체 회사들은 아시아에 단순 조립·가공 공장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만들기에는 단가가 안 맞지만 여전히 팔 수 있는 싼 제품 위주였죠. 한국도 모토롤라가 트랜지스터 공장을 세우려고 서류를 내던 시절이었습니다.

07. 한국도 그랬듯이 대만도 60년대를 지나 70년대에 들어서며 경제가 고도성장했고, 정부는 가발·신발·옷 같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산업 구조를 바꾸려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1971년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중국 본토의 공산당 정권과 관계 정상화를 선언한 것이죠. 실제 수교는 1978년 말에야 이루어졌지만, 대만 입장에서는 난리가 난 셈이었습니다. 미국과 더 강하게 연결되지 않으면 독립은 물론 안정을 지키기도 어렵겠다는 위기감이 커졌고, 실제로 닉슨의 발표 직후 대만에 대한 외국인 투자가 크게 줄었습니다. 1976년 마오쩌둥 사망 이후 중국이 경제 개발로 나아갈 거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값싼 중국의 노동력이 단순 조립·가공업에 뛰어들면 대만은 경쟁력을 잃을 거라는 우려도 커졌습니다. 안보를 위해서도, 수출 경쟁력을 위해서도 산업 구조를 바꿔야 했습니다.

08. 이에 대만 정부는 전자산업, 그중에서도 반도체 산업에 집중했습니다. 70년대 중반부터 미국 회사에서 구식 반도체 기술을 사 와 업체를 세우고 기술 개발을 진행했죠. 단순 조립 수준을 벗어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나 80년대 중반이 되어도 진전이 더뎠습니다. 진전은 있었지만 기술 격차가 좁혀지지 않아 돈이 되지 않았던 거죠. 여러 방법을 써 보던 대만 정부는 결국 모리스 창에게 SOS를 쳤던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대만 정부는 우리끼리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테고요.

09. 모리스 창을 연구 기관장으로 데려오고, 3주 만에 반도체 산업을 일으킬 방안을 내놓으라며 직접 맡아 달라고까지 한 것은 대만 정부가 그만큼 다급했다는 뜻이었습니다.

10. 당시 세계 반도체 산업의 지형은 이랬습니다. 시스템 반도체는 인텔을 비롯한 미국이 꽉 잡고 있었고, 최고의 인재들이 반도체 분야로 몰리는 분위기가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추격이 가능해 보였던 메모리 반도체는 일본 업체들이 장악하고 있었죠. 그런데 1985년에 플라자 합의가 있었습니다. 엔화 가치가 크게 오르면서 일본의 수출 경쟁력이 떨어졌고, 반도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국이 일본을 더는 봐주지 않겠다며 나서기 시작한 때였고, 한국과 대만 업체에게는 도약의 기회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죠.

11. 한국의 삼성은 1984년에 64K D램을 만들며 열심히 뛰고 있었지만, 당시 반도체 수요가 급감하면서 판매 가격이 생산 원가보다 떨어지는 상황을 맞았습니다. 개발 비용과 라인 투자에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갔는데, 팔면 팔수록 손해가 커지는 구조였죠. 그럼에도 삼성은 치킨 게임에서 물러서지 않고 공격적으로 투자를 이어 갔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판단이 큰 이익으로 돌아오기도 했지만, 당시 모리스 창이 보기에 이런 방식은 따라 하기 어렵다고 느꼈을 겁니다.

12. 모리스 창은 대만 정부에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고 합니다. 대화 형식으로 옮기면 대략 이렇습니다.

13. "반도체는 속도가 무엇보다 중요한 산업입니다. 미국에서 사 온 구식 기술을 기반으로 설계 개발 자체에 집착하다가는 선두 업체를 절대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지금 세계 반도체의 흐름은 설계와 생산이 분리되는 추세입니다. 예전에는 큰 회사들이 설계부터 생산까지 직접 했지만, 반도체 설계가 고도화되면서 생산 라인에 들어가는 돈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습니다. 큰 업체도 매번 감당하며 빠르게 따라가기 쉽지 않고, 작은 업체는 당연히 못 합니다. 그렇다면 신생 업체들이 설계한 반도체는 누가 만들까요? 지금까지는 큰 업체들이 자기 물량을 다 만들고 남는 라인에서 후순위로 생산해 주는 방식에 기댔습니다. 그런데 IT 기기가 늘고 정보통신 사회가 발전할수록 이런 물량은 점점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방식으로는 택도 없습니다."

14.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고 합니다. "제가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에서 일할 때 보니,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공장은 미국 공장보다 수율이 많게는 두 배 이상 잘 나왔습니다. 대만은 미국보다 일본과 비슷합니다. 그러니 대만은 생산에 집중해야 합니다. 대만이 반도체 산업을 일으키려면 생산에만 집중하는 파운드리 사업이 좋겠습니다."

15. 대만 정부의 반응도 주목할 만합니다. "그게 되겠냐?"가 아니라 "그럼 어떻게 하지? 진행시켜" 하는 식이었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모리스 창은 과거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시절 회사에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던 파운드리 사업 모델을 대만에서 시작하게 된 겁니다.

16. 1987년 대만 정부가 투자하고, 필립스 같은 외국 자본도 참여하면서 TSMC(대만반도체제조회사)가 설립됩니다. 지금도 TSMC에는 대만 정부 측 지분이 많습니다. 모리스 창이 이끄는 TSMC는 처음부터 글로벌 진출을 목표로 했고, 고객들에게 공개적으로 약속했습니다. "우리는 절대 칩을 설계하지 않고 만들기만 하겠다.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 인텔이나 삼성처럼 설계와 생산을 동시에 하던 기존 공룡들과 달리, 생산만 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17. 하지만 처음부터 물량이 쏟아져 들어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러 회사에 물량을 달라고 제안했고, 모리스 창이 미국에서 쌓아 온 인맥 덕분에 인텔,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도시바, 히타치, 소니 등에 제안했지만 처음에는 세 곳에서만 물량을 받았습니다. 첨단 칩이 아니라 구식이지만 여전히 팔리는 제품, 그리고 그들이 직접 만들기 부담스러운 것들이었죠. 그렇지만 이 물량을 받아 경험을 쌓고 레퍼런스가 쌓이자, 모리스 창의 예상대로 규모가 작거나 생긴 지 얼마 안 된 신생 기업들이 물량을 맡기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설계한 반도체를 만들어 달라고 TSMC를 찾기 시작한 것이죠.

18. 이 과정에서 모리스 창과 그가 데려온 미국 네트워크와 경험을 갖춘 인력들이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선진국 기업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직접 영업을 하고 연락을 돌리니 힘이 컸습니다. 사람 몇 명이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셈이죠.

19. 그렇게 찾아온 신생 기업들을 TSMC는 알을 품듯 소중하게 대했습니다. 그 알에서 나온 존재가 바로 마벨, 콤텍(Quantum/Cirrus 계열 등 여러 신생사), 브로드컴, 그리고 엔비디아 같은 기업들이었습니다. 신생 기업 입장에서 반도체는 설계 파일만 넘긴다고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생산 업체와 긴밀히 협력해야 하죠. 그런데 기존에 칩 설계와 생산을 함께 하던 대기업에 생산을 맡기면 어떨까요? 우리 아이디어를 가져가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 수밖에 없고, 생산 우선순위에서도 밀릴 수 있습니다. 반면 TSMC는 자기 칩을 설계하지 않으니 고객과 경쟁할 일이 없고, 신생 기업도 중요한 고객으로 대우해 줬습니다.

20. 엔비디아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 줍니다. 창립 2년쯤 된 1995년, 엔비디아가 첫 칩을 TSMC가 만들어 줄 수 있냐는 제안을 보냈는데, 놀랍게도 당시 64세였던 모리스 창이 32세의 젠슨 황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습니다. "저는 모리스 창이라고 합니다." 젠슨 황은 주변에 "모리스 창이 직접 전화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젠슨 황에 따르면 그때 모리스 창은 세 가지를 강조했습니다. 첫째, TSMC는 고객과 절대 경쟁하지 않고 생산만 한다. 둘째, TSMC는 장기적인 협력 파트너를 찾는다. 신생 기업인 당신들의 성장을 도우며 함께 잘되고 싶다. 셋째, 당신들을 위해 어떤 어려움이든 뛰어넘겠다. 여기서 '불의 고리(ring of fire)'라는 표현까지 썼다고 하죠. 그 말 그대로 어떤 불길이라도 뛰어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21. 이후 TSMC는 2011년에 엔비디아의 10억 번째 칩을 생산했고, 지금도 함께 가고 있습니다. TSMC는 번 돈을 계속 연구개발과 첨단 공정에 투자했고, 이제는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처럼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첨단 장비를 가장 많이 보유한 곳이 되었습니다. ASML 장비는 1년에 몇십 대밖에 만들지 못하는데, 그중 가장 많이 사 가는 곳도 지금까지 TSMC입니다.

22. 이 관계는 신생 기업에게만 중요했던 게 아닙니다. 반도체 삼국지라는 책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다양한 성능 조건에 맞춰 공정 배치와 수율을 동시에 만족시키려면, 파운드리 업체는 사실상 고객사의 설계 과정부터 관여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용할 수 있는 소재와 장비, 설계 업체가 최적화하려는 성능에 맞춘 조합, 목표 생산량을 맞추기 위한 자원 배분과 후공정 비용 계산 등 거의 전 주기에 걸친 공정 계획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설계 단계부터 TSMC와 긴밀히 일해 온 고객은 TSMC 방식이 사실상 표준처럼 자리 잡아 쉽게 떠나기 어렵게 됩니다. 처음엔 신생 고객을 품어 키웠지만, 고객이 커진 뒤에는 그들을 잃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아지는 것이죠.

23. 한번 궤도에 오른 TSMC는 인재 확보와 연구개발, 장비 투자에 공격적으로 힘을 쏟았습니다. 반도체 산업에서는 남들보다 앞서는 속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니까요. 대표적인 것이 2000년대 중반 모바일 시대의 개막입니다.

24. 2005년 모리스 창은 CEO 자리에서 물러나며 후임자를 앉혔습니다. 당시 그는 70대 후반이었고, 자기 임무는 다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투자에 주춤하는 분위기가 나타났습니다. 장비 한 대에 수천억 원이 들고 인건비도 많이 드니, 투자를 줄이는 것이 당연해 보였죠. 이를 지켜보던 모리스 창은 노구를 이끌고 다시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연구개발 비용을 두 배로 늘리고, 인력을 복귀시키고, 장비 투자를 공격적으로 압도적으로 늘리라고 지시했습니다. 잉여 생산물이 나와도 괜찮다, 압도적인 생산 능력으로 가겠다는 것이었죠. 과거 삼성이 돈이 불타는 듯 보여도 계속 투자하며 추격했던 방식과 닮은 행보였습니다.

25. 이 투자는 성과를 냈습니다. 아이폰이 등장하고 모바일 시대가 열렸습니다. 원래 애플의 칩은 삼성이 생산하고 있었는데, 삼성도 스마트폰 시장에 뛰어들면서 경쟁자가 되었습니다. 애플 입장에서 경쟁자에게 칩 생산을 맡기기는 부담스러웠죠. 복귀한 모리스 창은 애플 계약을 직접 따내기 위해 샌프란시스코까지 날아갔다고 합니다. 당시 그는 칠십 대 후반 노인이었습니다.

26. 왜 그랬을까요? 스마트폰이 급속히 확산되는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었고, 애플이 원하는 수준의 칩을 만들 수 있는 업체는 세계에 몇 개 없었습니다. 삼성은 고객사 입장에서 경쟁자이고, 미국 업체들은 애플의 요구를 맞출 역량이 부족했죠. 모리스 창의 철학은 1편에서도 말했듯 "엄청 많이 팔릴 것이라고 본다면, 손해 보는 것 같아도 일단 생산에 배팅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생산량이 확 늘면 결국 이익으로 전환되고, 그 이익은 점점 막대해진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판단으로 TSMC는 아이폰, 아이패드, 맥북까지 생산하게 되었고, TSMC와 애플은 서로 없어서는 안 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27. 그렇다고 TSMC에 위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미·중 갈등으로 화웨이 같은 큰 중국 고객사를 잃으면서 타격을 입었고, 이는 미국 등 다른 지역 회사들로 벌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대만을 위협하는 중국 때문에 대만의 핵심 시설이 몰려 있는 TSMC는 늘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 일본으로 생산 기지를 확대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28. 그에 따른 고민도 이어집니다. 대만을 벗어나서도 수율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 비용은 어떨지, 그리고 TSMC와 함께 움직이는 대만 기반의 복잡한 반도체 생산 생태계를 해외에서도 유지할 수 있을지가 문제가 될 것입니다. 지금은 TSMC를 위협할 경쟁자가 없다고 하지만, 이렇게 복잡한 지정학적 문제가 얽히는 과정에서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는 알 수 없습니다.

29. 두 편에 걸쳐 살펴본 TSMC의 이야기는 결국 이런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TSMC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반도체 산업의 미래는 어떻게 펼쳐질까요? 미국에서 아시아로 넘어온 반도체 산업의 중심축은 계속 아시아에 머물 수 있을까요? 이는 우리에게도 아주 중요한 문제일 테니, 함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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