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오태민 ·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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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코인의 시작이 익명의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임의성'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종교(기독교)나 한강의 기원처럼 시작이 임의적이어도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은 흔한 일이라고 주장. 수요 측면에서는 국가 통제 불가능한 화폐에 대한 필요가 있고, 비트코인이 그 수요를 폭발시켰다고 설명. 2022년 트위터 비판자들의 '임의성' 문제제기를 이해하면서도 한계가 있다고 반박. 자막상 특정 자산의 가격 전망 발언은 확인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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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시를 믿느냐는 질문은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지 않지만, 2014년 당시에는 이 질문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던져졌습니다. 그 당시 유통량 1,200만 개 중 100만 개를 가진 사람이 그걸 쏟아낼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비트코인을 다 알고 나서도 끝내 사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비트코인의 시작은 익명의 사토시 나카모토입니다. 누군지도 모르고, 어디에서 보낸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만든 것을 보편 화폐라고 말하니, 멀쩡한 대학을 나오고 멀쩡한 직업을 가진 사람일수록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보편성을 말하는데 시작은 임의적이니까요.
2022년 트위터의 핵심 담론도 이 지점이었습니다. 비트코인 맥시멀리스트들에게는 비트코인이 이미 보편적인 것이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여전히 임의적으로 보였습니다. 트럼프가 비트코인을 얘기하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임의성이라는 말은 제가 여러 번 해 왔습니다. 시작은 자극적이고 임의적이다, 이런 얘기를 반복해 왔죠. 그 친구들의 문제제기를 이해하면서도, 저는 그 생각의 한계가 어디인지 말씀드렸습니다. "2014년에 비트코인을 넘어서지 못한 사람들의 비판과 2022년에 오태민을 믿느냐는 질문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사토시를 믿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쪽은, 2022년의 저를 어떻게 믿느냐고 묻는 것과 같은 구조라는 얘기입니다.
비트코인을 분명히 알고 관심도 가졌지만 마지막 단계를 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지점에서 막히는 것이 바로 임의성입니다. 하지만 비트코인이 추구하는 것은 보편성입니다. 기독교도 그렇습니다. 2천 년이 지난 지금은 기독교인이 되어 있지만, 기독교 바깥의 사람에게 "2000년 전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그 아이가 신이라는 걸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면 같은 질문이 됩니다. 기독교 내러티브 안으로 들어오려면 그 임의성을 극복해야 합니다. 극복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지만, 결국 어떤 경우에도 같은 문제에 부딪힙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바라는 특별한 시작은 오히려 이상합니다. 왕이나 신의 아들이라면 전 세계 왕들을 모아 놓고 나타나거나, 하늘에서 빛과 함께 내려와 누구나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실제 기독교는 아주 임의적인 시작 위에 서 있습니다. 그 시작이 몇 천 년을 거치면서 신앙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사토시 나카모토도 지금은 누구나 아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2014년 제가 그걸 발견했을 때 그 임의성이 불편했던 것처럼, 시작은 누구에게나 어색합니다. 한강도 마찬가지입니다. 발원지를 따지면 여러 설이 있을 수 있지만, 한강이라는 실체는 한국인에게 분명히 보편적입니다. 시원은 애매해도 실체는 확실하죠.
임의성이 사람들을 못 견디게 하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달러를 대체하겠다는 포부를 가진 비트코인의 시작이 익명의 사토시 나카모토이고, 일본식 이름이라 마음에 안 든다고 하거나, 사라져 버린 사람이라고 하고, 기술력도 없어 보이고 문과 출신에 박사도 회계사도 변호사도 의사도 아닌 제가 비트코인 책을 몇 권 쓰고 있다는 것. 그 거부감은 사실 같은 종류입니다. 그리고 그 거부감은 타당한 측면도 있습니다.
비트코인이 등장한 배경을 수요 측면에서 보면 분명히 필요가 있었습니다. 국가가 통제할 수 없고, 달러로 표현되는 기존 질서가 전환기를 맞고 있는 시점에서, 민초들이 이건 가치가 있으니 소유하겠다고 생각하는 화폐, 그리고 미국 같은 강대국도 바꿀 수 없는 규칙에 기반한 무엇인가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수요 측면에서 보면 보편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것이 사토시 나카모토가 만든 비트코인이어야 했는지에 대한 질문은 끊임없이 남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서는 설명은 할 수 있지만 필연성은 없습니다. 임의성은 필연적이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난처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 수요를 폭발시킨 것이 바로 그 임의적인 시작의 비트코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어떤 프로젝트는 공공재를 확보하고, 헌신적인 리더가 증권법 시비가 없도록 설계하고, 창시자가 같이 있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신뢰망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면 나중에 "아, 그런 게 필요했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니 왜 한국의 총리나 대기업이 아니라 임의적인 오태민이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같습니다. 사토시 나카모토가 15년 전에 이걸 만들었든, 오태민이 관악산에서 이걸 만들었든 똑같이 임의적입니다. 테슬라도 공기업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작은 임의적인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이 지점에서 걸려 넘어지는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지구도 마찬가지입니다. 멀리서 보면 지구는 보편적인 둥근 구체이지만, 우리가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완벽한 원과는 다릅니다. 지도를 보면 보편적인 대륙이라는 건 없습니다. 모두 특별한 사연을 가지고 있고, 기괴하게 생겼습니다. 우리가 단순하게 원이나 삼각형, 네모로 도식화하지만, 실제로는 해안선과 지형 때문에 기후가 영향을 받고, 지정학적으로 요충지가 되기도 하고 아닌 곳도 생깁니다. 그 지리적 배치로 필연성을 따지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모든 것이 임의적으로 시작됩니다.
그렇다고 임의적인 것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임의적인 것이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시작이 임의적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이 보편성으로 자라나는 과정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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