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오태민 ·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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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은 '입문학' 시리즈 1강으로, 인식론을 소개한다. 저자는 비트코인 투자로 연봉 약 2억을 잃고 대치동 학원 수입이 줄었다고 회고하며, 철학적 화두로 '내가 안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하는가'를 던진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플라톤 동굴의 비유, 데카르트, 시뮬레이션 가설 등을 소개하고 지각의 매개성·표상의 문제를 설명한다. 인지과학의 흑맥주 실험과 진화론적 인식론을 들어 인식이 실제를 대체로 모사한다는 인식론적 낙관론으로 맺는다. 투자 종목에 대한 언급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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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러분. 오태민입니다. 반갑습니다. 우리는 입문학적 상상력을 공부하려고 합니다. 사실 라이브 방송에서 얘기했던 대로, 한 달에 한 번이라도 40분 정도 모여서 일주일에 한 번씩 공부를 해보자는 생각을 오래 해왔습니다. 가격이 침체되고 맨날 가격 얘기만 하다 보면 마음이 피폐해집니다.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사람을 선별할 방법도 없고, 예전처럼 시험을 치르는 것도 현실적이지 않아서 고민하다가 한 달에 한 자리를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긴 이야기의 시작이고, 그 긴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갈 생각입니다.
저도 이 이야기가 어디로 갈지는 아직 잘 모릅니다. 다만 제가 30년 가까이 독서를 해왔고, 그중 20년쯤 되던 무렵에 비트코인을 만났고, 그 뒤로도 10년 넘게 계속 읽어왔기 때문에 여러분께 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물론 그것이 다 맞다거나 진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비트코인이라는 빅딩이든 모빅이라는 것이든, 우리는 이것을 두고 많은 고민과 갈등을 겪게 됩니다. 그때 입문학적인 이야기를 나누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천일야화처럼 긴 이야기의 시작이 될 것 같습니다. 함께 끝까지 가 보죠.
입문학의 시작은 철학이고,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가 인식론입니다. 인식론은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데, 내가 그것을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알지?"라고 묻는 학문입니다. 여러분은 제 고민을 들어보셨으니 아실 겁니다. 11년 전에 제가 무엇에 홀렸는지, 계시를 받은 것인지, 진짜로 깨달은 것인지, 아니면 득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저는 비트코인이 1억까지 간다고 알고 굳게 믿었고, 그 믿음대로 움직였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정말 알았던 걸까요?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나는 무엇을 근거로 확신했을까요? 이것이 제 화두입니다. 돌이켜 보면 꽤 무모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당시 저는 연봉이 2억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비트코인을 만나고 나서 그 수입이 모두 끊어졌습니다. 제가 한창 빠져 있을 때 대치동 학원에 자녀 입시를 위해 찾아온 엄마들에게 비트코인 얘기를 했습니다. 11년 전 대치동 엄마들은 저주를 받은 셈입니다. 아이들을 명문대에 보내는 대신 비트코인을 선택해야 했던 거죠. 그러고 나서 학생들이 떨어져 나갔고, 학원 원장들도 짜증을 냈습니다. 소득은 뚝 떨어졌습니다. 지금은 아내가 고생을 해서 유한마담처럼 지내고 계시는데, 제 카드와 제 코인을 많이 쓰고 계십니다. 고생했으니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며 웃어넘기기도 합니다. 어쨌든 저는 이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그것만큼은 확실합니다. "What we know"가 아니라 "What I know", 즉 내가 알고 있었던 것, 그것은 분명한데 그것을 내가 어떻게 알았을까요? 내가 안다는 것을 나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철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화두입니다.
철학을 몰라도 우리는 와인을 마시고 취할 수 있고, 음악을 들으며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철학을 할까요? 철학을 하기 시작하면 와인 맛이 없어지고 음악을 들어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갑자기 하기 싫어지기도 하죠. 그럼에도 철학을 하는 이유는, 풀리지 않는 질문들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1920년대 벨기에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떠올려 봅시다. 당시 유럽, 특히 서유럽은 퇴폐적 분위기가 짙었고,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라 패배주의에 젖어 있었습니다. 마그리트가 그린 그림 중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가 있습니다. 갤러리에 걸었더니 사람들이 "파이프가 아니면 뭐냐, 어린왕자에 나오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냐" 하고 갸우뚱했습니다. 마그리트는 농담처럼 말했습니다. "이건 파이프를 그린 그림이지, 파이프가 아니잖아." 너무 당연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저 말장난이 아니라, 인식론의 중요한 화두를 가지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인식론의 구조를 보면, 모형과 실제, 그리고 그것을 인식하는 주관, 즉 '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저 오태민이라는 실제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철학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본 것은 여러분의 시지각에 인식된 오태민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여러분의 인식에 따라 모두 주관적입니다. 철학에서 '객관'이라는 개념도 정의하기 어렵습니다. 어쨌든 모형, 실제, 인식하는 주관, 이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 세 가지가 어떻게 배열되고 상호작용하는지에 대해서는 철학자마다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이 인식론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를 지각의 매개성, 표상의 문제라고 부릅니다.
지각의 매개성은 우리가 오감과 뇌의 해석 메커니즘을 통해서만 세계를 인식한다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북극성을 보면 북극성을 본다고 생각하겠지만, 철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북극성에서 나온 빛은 수십만 년 전에 출발했고, 그 빛이 수십만 년에 걸쳐 여기까지 와서 내 눈에 닿은 것입니다. 그러니 북극성이 지금 저기 있는 게 아니라 내 머릿속에 있는 것입니다. 매개에는 시간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실제 북극성이 지금 어떤 모습인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가까이 있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철학자들은 말합니다. 믿기 어렵다면 그냥 믿으셔도 됩니다만, 이는 철학에서 천재들이 고민을 끝낸 문제입니다. 이에 반박하는 이론이 없습니다. 우리는 대상 자체를 인식할 능력이 없습니다. 슬프지만 그것이 현실입니다.
표상의 문제는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그대로의 세계와 일치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칸트가 이를 정리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세계로부터 완전히 기만당하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질문이 가능해집니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매우 진지한 질문입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가 떠오릅니다. 우리는 실제를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있는 것이고, 그 벽을 향해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1 더하기 1은 2다"라는 것을 내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혹시 악마가 내 머릿속을 조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현대철학에서는 이것이 시뮬레이션 가설로 이어져서 진지한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일론 머스크도 이를 언급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모든 것이 시뮬레이션이라면, 나라는 존재는 없고 각자의 인식 주관만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화 『매트릭스』처럼 어딘가에서 뇌에 무언가가 꽂혀 있고, 모든 것이 허상일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점은 이것입니다.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여러분은 시뮬레이션 속에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믿는 대로 실제로 살아 있고, 만지고 보는 것이 실제일 수도 있습니다. 시뮬레이션 이론은 '대가설'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가설이 그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잠들어 있고, 누군가 여러분의 뇌만 살려 두고 김밥을 먹는 감각을 프로그램으로 입력해 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둘 중 어떤 것이 진실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두 상황은 엄밀하게 구별할 수 없습니다. 현실에서 이를 구현하려면 기술적 오류나 버그가 생길 수 있겠지만,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절대자가 만든 프로그램 속에 우리가 있다면, 우리는 그 프로그램 속에서 그것을 실제라고 믿을 것입니다. 두 상황이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이 질문의 핵심입니다.
색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빨간색, 파란색, 보라색은 대상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빛이 대상의 표면에 부딪혀 반사되고, 그 반사광을 우리 눈이 받아들여 뇌가 인식하는 것입니다. 색이란 우리 뇌가 대상의 표면을 읽어내는 신호 방식이지, 빨간색이 대상 자체에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악은 일정한 공기의 진동을 우리가 인식하는 방식일 뿐이고, 본질은 주파수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음악으로 받아들여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색깔도 음악도 우리 머릿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인지과학에서도 동의하는 내용이므로 이론의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사실을 철학자들이 수천 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철학자들은 이런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이니, 실용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공부를 하는 셈이죠. 그렇다면 철학은 이 문제를 극복할 방법도 가지고 있을까요? 있습니다. 진화론적 인식론이라는 관점입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진화한 존재입니다. 만약 우리가 완전한 허상 속에 살고 있었다면, 우리는 진작에 멸종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빨간색이 대상 자체에 있지 않더라도, 빨간색과 대상 사이에는 함수적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근거 없는 낭설이 아닙니다. 빨간색을 보면 기분이 나쁘거나 피를 연상하는 것은 감정이라는 복합적인 정보로 우리에게 오는 것인데, 이는 생존에 유용한 진화적 정보입니다.
예를 들어 칼로 무언가를 베었을 때 맑은 물이 나오면 우리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빨간 물이 확 나오면 갑자기 아파집니다. 여기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아프고 나서 보니 빨간색이었던 것이 아니라, 빨간색을 보고 나서 아픈 것이 먼저 감지된 것입니다. 우리 몸은 그 신호를 빠르게 처리해 생존에 도움을 줍니다.
또 하나 유명한 사고실험이 있습니다. 한 철학자가 쓴 짧은 에세이입니다. 그는 미국 사람이고, 소파에 앉아 미식축구를 보면서 탁자 위에 음료수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때 밖에서 운동을 하고 돌아온 아들이 씩씩거리며 들어와서, 검은색 잔에 담긴 시원해 보이는 음료수를 순간적으로 입에 댔습니다. 당연히 아들은 콜라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흑맥주였습니다.
이때 아들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여러분도 가끔 이런 경험을 하실 수 있습니다. 콜라 맛도 아니고 흑맥주 맛도 아닌, 아주 짧은 순간 아무 맛도 나지 않습니다. 만약 진짜 콜라였다면 바로 콜라 맛을 느꼈을 것입니다. 또 아들이 아버지가 흑맥주를 마시며 미식축구를 보는 습관을 알고 있었다면, 바로 흑맥주 맛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콜라인 줄 알고 흑맥주를 마시면, 잠깐 동안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고 나서 머릿속에서 데이터를 찾습니다. "이건 콜라가 아니다. 그럼 이건 뭐지? 흑맥주네." 그제야 흑맥주 맛이 나는 것입니다. 제 얘기가 뻥 같나요? 철학자들은 이미 이런 것을 알고 있었고, 현대 인지과학이 실험으로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의 인식 주관은 매우 창의적이고 주관적이며, 상상력이 풍부합니다.
또 통계를 다루는 사람들은 이렇게 설명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측을 하고, 사태가 변화하면서 오차가 생기지만, 시행착오를 거치며 계속 따라간다고요. 시도하고, 오류를 발견하고, 수정하고, 다시 시도하고. 철학자의 아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콜라가 아니네." 콜라를 인식하는 수용체가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배열을 바꿔서 흑맥주를 인식하는 수용체로 바꿔 끼우고, 그렇게 인식을 합니다. 시행착오를 거쳐 점점 근사해지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뇌는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신체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혀, 손, 발 같은 감각기관이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뇌만 고립되어 자극을 받는 상황과는 다릅니다. 이러한 상호작용 속에서 인식은 완전히 허황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철학자들의 시뮬레이션 가설은 다소 황당하지만, 여러 감각과 경험이 교차하며 서로 검증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래서 우리의 주관적 인식이 그렇게까지 주관적이지는 않습니다. 행위에 기반한 인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것이 상식적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앞서 말한 데카르트, 플라톤, 시뮬레이션 같은 이야기는 우리의 인식과 세계를 구별해서 보는 관점입니다. 세계는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인식을 통해 들어오고, 색도 우리 인식 속에 있을 뿐이며, 우리가 재창조한 것입니다. 소리와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둘이 구별된다는 철학자들의 생각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런 입장을 인식론적 비관론, 또는 회의론이라고 합니다. 인식론적 비관론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제가 어느 정도 갖고 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아주 깜깜한 공간에 들어가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빛이 전혀 없습니다. 그 방이 네모 모양인지, 세모인지, 다각형인지 여러분은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오감을 이용해 상상합니다. 그것이 모델입니다. 둥근 공 모양일 수도 있고, 사각형이나 삼각형일 수도 있습니다. 가서 만져보며 더듬을 수는 있지만, 그 전에 여러분은 이미 어떤 모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모형과 실제 방의 구조는 차이가 있겠죠. 그러나 이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오태민이 전체를 한눈에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그 안에서 여러 번 뒹굴다 보면, 동그라미라면 있을 수 없는 현상이 나타나고, 네모라면 생길 수 없는 뾰족한 각도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시행착오를 거치며 대충 근접해 갑니다. 우리의 인식이 실제를 대략 모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식론적 낙관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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