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박종훈 · 한국인
요약 보기
미국 반도체법(칩스법) 지원금은 조건이 치명적이다. 시설 접근권 요구는 기술 유출 우려를 낳고, 초과이익 75% 환수는 회계장부를 통한 기밀 노출을 초래하며, 10년간 중국 추가투자 금지는 기존 50조원 중국 투자 설비를 무력화할 수 있다. 어린이집 설치 등 부담까지 더하면 지원금보다 비용이 클 수 있다. 반도체 수출은 42.5% 급감하고 재고율은 26년 만에 최고이며, 일본처럼 로비로 가이드라인 전에 개입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정부 간 외교가 시급하다.
다듬은 글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정말 치명적인 상황입니다. 반도체 산업을 뺀 대한민국을 상상이 가십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번에도 또 놓친 겁니다. 지난해 미국에서 칩스법안이 나와 반도체 지원금을 화끈하게 쏜다고 하니 기대가 정말 컸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지원을 해주는 게 아니라 잘못하면 뒤통수를 맞겠다는 논란이 크게 일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원래 미국에서는 첨단 반도체 공장이나 연구시설을 지으면 그 비용의 5에서 15% 정도를 미국 정부 돈으로 주겠다고 했습니다. 지원금 총규모는 390억 달러, 우리 돈으로 51조 원 정도입니다. 당장 삼성전자가 미국 텍사스주에 짓고 있는 공장이 22조 3천억 원이 드는데, 15%를 지원받으면 3조 4천억 원을 받는 셈이니 "조 단위 지원금이니 좋은 거네"라고 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원금은 공짜로 주는 게 아닙니다. 조건을 세세하게 붙여 놓았고, 너무 복잡하며 그중 치명적이고 위험한 조건 세 가지를 꼽아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미국 정부가 시설 접근권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반도체 생산과 연구시설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제공하는 기업에 우선순위로 보조금을 주겠다는 건데, 이 시설 접근권이라는 표현이 아주 모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호하다는 건 결국 미국 정부가 원할 때 적극적으로 해석해서,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가진 핵심 기술까지 다 들여다볼 수 있다는 뜻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면 영업기밀뿐 아니라 생산기술 같은 반도체의 가장 핵심적이고 내밀한 기밀까지 미국 정부 관계자가 볼 수 있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보는 사람이 늘어나면 기술이 새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반도체 산업은 기술력 하나만 조금 앞서도 금방 추격당하는 분야인데, 그 상대가 중국이나 다른 나라가 아니라 미국이라면 언제든 우리를 더 빠르게 추격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논란은 초과 이익을 환수한다는 조항입니다. 재건축 초과이익 환수도 우리나라에서 될지 말지 논란이 많았는데, 반도체 기업에게 초과 이익을 환수한다는 것은 시장경제를 내세우는 미국에서도 말이 안 된다는 얘기가 미국 내에서도 나옵니다. 반도체 기업이 돈을 많이 벌었다고 미국 정부가 이를 환수해 가는 건 꽤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지원금을 신청할 때 예상 수익을 제출하고, 예상보다 초과하면 미국이 제공한 지원금의 최대 75%까지 이익을 환수해 간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주고 다시 뺏는 셈이죠. 지원금을 받으려다 75%나 되는 초과 이익을 환수당할 수 있다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여기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초과 이익을 환수하는 과정에서 우리 기업들의 회계장부를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회계장부에는 우리가 도입하려는 첨단 기술의 비밀이나 기업의 전략이 고스란히 담길 수밖에 없습니다. 단순히 돈만 빼앗기는 게 아니라 내밀한 기술력과 전략까지 다 뺏길 수 있는 아주 심각한 상황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논란은 앞으로 10년 동안 중국 등 미국 안보를 해칠 수 있는 나라에 반도체 공장을 추가로 투자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조항입니다. 언뜻 들으면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중국에서 조금 벗어나야 하니 추가 투자만 안 하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나라가 중국에 투자한 반도체 공장 규모가 50조 원이 넘습니다. 그런데 반도체 시설은 아파트처럼 한번 지어 놓으면 20년, 30년 그대로 쓰는 게 아닙니다. 최신 상태를 유지하려면 계속 업그레이드에 투자해야 하고, 돈을 계속 넣어야만 최신 기술을 담을 수 있습니다. 반도체는 1, 2년만 지나도 구형이 됩니다. 중국 공장이 구형밖에 못 만들게 되면 50조 원의 투자가 그대로 무시되면서 헛투자가 되어 버립니다. 그렇다고 중국 공장을 갑자기 다 빼서 다른 나라로 옮기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똑같은 생산 설비를 다시 만드는 데 또 50조 원이 들고, 탈중국을 아무리 해도 순식간에 할 수는 없으니 몇 년이 걸릴 것입니다. 그 사이 다른 나라에 따라잡힐 가능성이 커집니다. 특히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강력한 미국 기업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에게 우리를 역전할 절호의 기회를 주게 됩니다.
이 세 가지만 해도 치명적인데, 이 밖에도 온갖 규정이 있습니다. 미국 공장 직원을 반도체 인력으로 양성하라는 조건도 있고, 공장 안에 어린이집을 설치해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라는 조건도 있습니다. 미국은 어린이집 비용이 엄청나게 비싸서 이것을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다 부담해야 지원금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모두 모으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입니다. 지원금보다 미국에 베풀어야 할 비용이 더 커질 수도 있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지원금을 포기할 수 있느냐? 이것도 정말 쉽지 않습니다. 우리 기업들은 이 지원금을 기대하고 이미 미국에 투자를 한 상태입니다. 공장을 짓다가 말 수 있겠습니까? 미국 입장에서는 미중 패권전쟁에서 반도체 산업의 칼끝이 되어 주기를 우리에게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지원금 안 받겠다"고 하면, 미국 입장에서는 우리가 자기 편이 아니라 중국 편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삼성전자가 텍사스에 이미 투자를 해서 빼기도 어려운 상황을 만들어 놓고 가이드라인을 발표한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우리 반도체 산업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입니다. IMF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아주 심각한 적자 상황입니다. 적자의 원인을 따져 보면 반도체 수출이 급감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8월부터 무려 7개월째 반도체 수출이 급격하게 줄고 있고, 지난 2월에는 반도체 수출이 전년 동월보다 42.5%나 감소했습니다. 이대로 가면 반토막 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입니다. 반도체 재고율은 26년 만에 최고 수준입니다. 삼성전자 같은 기업의 창고에는 팔지 못한 반도체가 가득 쌓여 있고, 몇십조 원어치가 재고로 남아 있습니다.
이쯤 되면 우리나라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진작에 막을 수 있었던 것이 있었는데, 그게 안타깝습니다. 미국은 로비가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나라입니다. 로비스트라는 직업이 있고, 돈도 엄청나게 많이 벌며 각광받는 직업입니다. 일본 같은 나라는 뛰어난 로비스트를 고용해 미 의회와 정부에 네트워크를 갖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 로비스트를 통해 가이드라인이 확정되기 전에 유리하게 바꿔 놓는 작업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번에도 놓쳤습니다. 가이드라인이 나오기 전에 막았어야 했는데, 이미 활자화되고 나면 바꾸기가 정말 힘듭니다.
또 하나 안타까운 점은, 지난해 나온 인플레이션 감축법, 즉 IRA 때도 우리 배터리와 전기차 산업이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때도 미국 정부는 반도체 지원법 가이드라인이 그 무렵 나온다고 미리 예고를 했습니다. IRA처럼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나온다고 예고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로비를 최대한 동원해 미리 영향을 미쳤어야 했습니다. 이것을 기업 단위에서 하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미국 정부를 상대로 우리 기업이 같은 수준으로 대응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정부 대 정부로 미국 정부와 의회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 한발 늦었지만 그래도 정부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김성환 국가안보실장이 미국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반도체 산업에서 계속 밀리고 협상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안타깝게도 우리 반도체 산업과 생태계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반도체 산업을 뺀 대한민국은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반도체 생태계와 우리 기업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정부의 외교가 중요한 때가 지금이라고 생각합니다.







Comments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