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미상 · 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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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런 버핏의 생애와 투자 이력을 소개하는 교육용 영상으로, 특정 자산의 향후 가격 방향에 대한 예측 발언은 없다. 어린 시절 주식 첫 매수(11세, 시티서비스 우선주 3주)와 이른 매도 경험, 신문배달·핀볼 사업 등 사업 경험을 설명한다. 대학·대학원(컬럼비아, 벤저민 그레이엄 사사) 학업과 그레이엄 파트너십 근무, 1956년 버핏 파트너십 설립 과정을 다룬다. 1962년 버크셔 해서웨이 인수와 1960~70년대 보험사 인수를 통한 사업 전환을 설명하고, 현재 자산 규모(약 840억 달러)와 자선 기부(게이츠 재단 등)를 언급한다. 결론적으로 버핏을 장기 투자와 인내의 사례로 소개하며, 개별 종목·지수·금리·환율에 대한 전망은 제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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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런 버핏은 전 세계 수많은 투자자의 롤모델이자, 지금도 그런 위치에 있는 인물입니다. 11살에 첫 주식을 산 이후 쌓아 온 투자 이력은 수많은 강연에서 소개되어 왔고, 초보든 전문가든 많은 투자자들이 그를 따라 해 보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그런데 워런 버핏은 누구일까요? 이번 영상에서는 "오마하의 현인"으로 불리는 이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그가 세계 최고 부자이자 가장 존경받는 사업가 중 한 명이 되기까지 내린 투자와 결정들을 짚어 보겠습니다. 워런 에드워드 버핏은 1930년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하워드와 릴라 버핏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워런은 금융과 사업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큰 숫자 열을 머릿속으로 더할 수 있을 만큼 수학에 뛰어난 아이였고, 이 재능은 훗날 그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30살까지 백만장자가 되지 못하면 오마하에서 가장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리겠다고 친구에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실제로 뛰어내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좋아요를, 뛰어내렸어야 한다고 생각하신다면 싫어요를 눌러 주세요.
워런은 11살에 처음으로 투자를 했습니다. 시티즈 서비스 우선주 3주를 주당 38달러에 샀습니다. 주가는 곧 40달러까지 올랐고, 그는 작은 이익을 남기고 팔아 버렸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주가가 주당 200달러까지 오르면서 이 결정을 크게 후회하게 됩니다. 그는 훗날 이 경험을 투자에서 인내심의 중요성을 배운 초기 교훈으로 꼽았습니다.
13살 때 워런은 신문 배달원으로 일했습니다. 아침 4시 30분에 일어나 워싱턴포스트를 배달했고, 신문 구독자들에게 잡지 구독권과 달력도 부업으로 팔았습니다. 15살이 되었을 때는 신문 배달로 2,000달러를 벌었는데, 오늘날 돈으로 약 2만 6,000달러에 해당합니다. 그중 1,200달러로는 40에이커짜리 농장을 샀는데, 네브래스카의 한 농부와 수익을 나누는 계약을 맺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7살에는 친구와 함께 중고 핀볼 기계를 25달러에 사서 동네 이발소에 설치했습니다. 몇 달 만에 오마하 곳곳의 여러 이발소에 기계를 놓게 되었고, 주당 약 25달러의 수입을 올렸습니다. 이 사업은 그해 말 1,200달러에 한 참전용사에게 팔았습니다.
워런은 네브래스카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받은 뒤 하버드 경영대학원에 지원했지만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혀 기죽지 않았고, 벤저민 그레이엄이 가르친다는 사실을 알고 컬럼비아 경영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1951년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습니다.
1952년 워런은 오마하로 돌아와 증권 중개인으로 일하면서, 데일 카네기의 대중 연설 과정도 함께 들었습니다. 그렇게 배운 것을 바탕으로 네브래스카 대학교에서 야간 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1954년에는 가족을 데리고 뉴욕으로 이사해 멘토인 벤저민 그레이엄 밑에서 일하게 됩니다. 이 시기를 보면, 워런은 경영대학원에 가겠다는 장기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돈을 벌고 나중에 현명하게 투자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 기회에 과감하게 뛰어든 것입니다.
1954년 워런은 그레이엄의 투자 회사에 입사했습니다. 그에게 멘토이자 대학 교수였던 사람의 회사였습니다. 첫 연봉은 1만 2,000달러로, 오늘날 돈으로 약 10만 9,000달러 정도입니다. 하지만 1956년 그레이엄이 은퇴하면서 이 동업 관계는 막을 내립니다. 이때 워런의 개인 저축은 17만 4,000달러가 넘었는데, 현재 가치로 약 150만 달러입니다.
워런은 여러 곳을 옮겨 다녔지만 결국 고향 오마하에 정착하기로 합니다. 그가 산 집은 3만 1,500달러짜리였습니다. 대부분의 백만장자는 수백만 달러짜리 집에 사는데, 놀랍게도 워런의 검소한 성격 때문에 그는 그 가격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워런은 주로 투자 상품을 파는 영업사원이자 증권 분석가로 일했습니다. 그리고 1956년 가까운 친구들과 가족들과 함께 버핏 파트너십을 시작했습니다. 이 파트너십에는 독특한 조건이 있었습니다. 우선 워런은 동업자 중 한 명인 의사에게 다른 의사 10명을 찾아 각각 1만 달러씩 투자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결국 11명이 동의했고, 워런은 처음에는 자기 돈 100달러만 투자했지만 운용 수수료를 다시 투자해 지분을 불려 나갔습니다.
1960년까지 버핏은 총 7개의 파트너십을 열었고, 100만 달러가 넘는 파트너십 자산 중 9.5%의 지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962년에는 파트너십 자산이 700만 달러를 넘었고, 그중 100만 달러가 워런의 몫이었습니다. 이로써 워런 버핏은 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곧 이 파트너십들을 하나의 회사로 합병했습니다.
1962년 워런 버핏은 자신이 "최악의 인수"라고 부르는 결정을 내립니다. 바로 지금은 유명해진 버크셔 해서웨이입니다. 이 회사는 1830년대에 시작된 뉴잉글랜드의 섬유 회사였는데, 전성기는 이미 지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워런은 여기서 돈을 벌 기회를 보았습니다. 회사가 어려운 근본 원인이 나쁜 경영 방식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공격적으로 주식을 사들였습니다. 경영진과 벌인 분쟁을 겪으면서 회사에 리더십 교체가 필요하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회사는 계속 적자를 냈습니다. 이 오래된 섬유 공룡에게 시절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1966년에는 뉴잉글랜드 섬유 회사의 황금기가 끝났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워런은 회사의 사업 구조에 급진적인 변화를 줍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거대 기업으로 회사를 밀어 올린 전환점이었습니다.
버핏은 버크셔의 초점을 점차 전통적인 섬유 사업에서 다른 기업에 투자하는 지주회사로 옮겼습니다. 1967년 버크셔에는 보험회사 두 곳을 살 수 있을 만큼 자금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이후 사들이게 될 수많은 보험회사의 첫걸음이었고, 버크셔 해서웨이가 놀라운 성공을 거두게 된 결정적인 전환점이었습니다.
워런은 보험회사들이 만들어 내는 막대한 현금 흐름을 이용해 추가 인수 자금을 마련했습니다. 오늘날 버크셔 해서웨이는 1,000개가 넘는 회사를 포트폴리오로 운용하고 있으며, 총자산은 7,000억 달러를 넘습니다. 워런 버핏은 1990년 버크셔가 A급 주식을 팔기 시작하면서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워런은 현재 자선 활동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가장 큰 기부 중 하나는 빌앤드멜린다게이츠재단에 한 것인데, 버크셔 해서웨이 주식 1억 8,500만 주를 시장 가치로 283억 달러어치 기부했습니다. 지금 워런의 재산은 840억 달러가 넘습니다. 외모만 보면 기업의 거물이라기보다 다정한 할아버지 같아서 특별해 보이지 않지만, 지적인 면에서는 견줄 사람이 없고 천재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소박하고 솔직하며 정직한 성품은 미워하기 어렵고, 재치와 매력은 전 세계 사람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를 신화 속 인물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워런 버핏은 어린 나이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내고 평생 그것을 놓지 않았던 한 사람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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